여기에 북 치는 고수(박철민)와 몰락한 양반(김동완)까지 합류해 떠돌이 광대패가 구성된다. 학규는 가는 곳마다 판소리 마당을 펼치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아내의 얼굴 그림을 보여주며 “혹시 본 적 없느냐”고 묻는다. 이 과정에서 그가 지어낸 이야기는 곧 ‘심청가’로 완성된다.
그의 한 맺힌 소리는 ‘광대: 소리꾼’의 애절함과 비장미를 극점까지 끌어올린다. 슬픈 느낌을 주는 계면조와 웅장한 느낌의 우조, 자진모리와 휘모리 장단까지 온몸으로 풀어낸다. 아내의 소재를 알고 탐관의 집에 들어가려다 두들겨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쏟아내는 절창은 하늘에 닿을 만큼 비통하다.
목숨이 달린 막바지 장면에선 뜨거운 눈물을 쏟게 한다. 심 봉사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대궐에서 딸을 만나고, 감격에 겨워 눈을 번쩍 뜨는 클라이맥스가 압권이다. 전통과 크로스오버 국악, 예능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전방위 소리꾼만이 할 수 있는 배역이다. 그는 KBS 경연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 2017년 ‘봄날은 간다’ ‘사랑의 굴레’에 판소리와 민요를 녹여 넣어 두 차례나 우승한 내공을 마음껏 뿜어냈다.
이는 처음부터 ‘심청가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을까’를 염두에 두고 만든 감독의 기획의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적 상상력을 녹여내 ‘가족을 찾아가면서 길 위에서 만드는 이야기’가 더 흥미를 끈다.
딸 역을 맡은 아역 배우 김하연(13)은 슬픈 서사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한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김하연은 극중 아버지를 향한 지극한 사랑과 어머니를 찾는 애틋한 여정에서 ‘너영 나영 두리둥실 놀구요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참사랑이로구나’라는 민요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에게 판소리를 가르친 학규 역의 이봉근은 “김하연이 절대음감을 지녔다”고 극찬했다.
알다시피 판소리는 소리꾼이 고수의 장단에 맞춰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 발림)을 곁들이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민속악이자 구비 서사시다. 여기에서 고수는 광대의 소리에 따라 장단을 치며 추임새로 극의 완급을 조율하는 사람. 소리를 맺고 푸는 걸 알아서 북의 통과 가죽을 가려 치는 것도 고수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이기에 ‘일고수(一鼓手) 이명창(二名唱)’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그는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보고 감동해 판소리 다섯 마당(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을 통째로 외워 버릴 정도로 소리에 미친 사람이다. 그때 이후 판소리 영화를 꿈꿨다. 이번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시놉시스부터 24년이 걸렸다니 뚝심도 대단하다.
그는 심청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하면서 시대를 초월한 지금의 얘기를 담아냈다. 조선 시대 인신매매단과 그 뒷배를 봐주는 탐관오리, 이들에게 수탈과 학대를 당하는 백성, 몰락한 양반을 가장한 암행어사가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과정을 통해 한 시대의 총체적 모습을 동시에 그렸다.
그래서 판소리 가락뿐만 아니라 현대 뮤지컬 요소와 웅장한 합창 장면까지 동원했다. 녹음도 100% 현장의 소리로 담았다. 제작비 57억원은 전액 개인 투자를 받아서 완성했다.
이 영화는 2년 전 ‘소리꾼’이란 제목으로 선보였다가 이번에 감독 버전으로 새로 만들었다. 음악을 대폭 강화하고 기존 장면도 교체하고 삭제된 영상을 추가하는 등 60% 이상을 바꿨다.
영화에 나오는 황금 연꽃은 그의 아내 작품이다. 대학 시절 만든 국악 동아리 후배인 아내는 전통자수를 배운 공예가다. 극중에서 삯바느질을 하는 ‘간난’에게 바느질과 자수를 가르쳐줬다. 감독은 옷가슴에 황금 연꽃을 수놓은 복주머니 자수를 꽂고 다니는데, 아내가 직접 만들어준 것이다.
‘땡중’ 역을 맡은 배우 임성철은 실향민 2세로 조부모의 고향이 평북 신의주다. 그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잘 담은 영화에 자부심을 갖는다고 했다. 영화 결말부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춘향가’를 차용한 것이어서 더욱 흥미를 돋운다.
판소리를 구성하는 3대 요소는 소리꾼, 고수, 청중이다. 격식을 갖추기보다는 평민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문화여서 관객들이 “얼쑤!” “'좋다!” “잘한다!” 등의 추임새로 동참한다. 이 때문에 판소리는 소리꾼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음악이 아니라 관객과 양방향으로 이뤄내는 종합 예술이다.
광대와 고수의 역할은 충분히 다했다. 남은 것은 관객의 호응이다. 2020년 첫 개봉 때 코로나 사태로 영화가 널리 퍼지지 못해 아쉬웠다는데, 수많은 관객들의 추임새가 개봉관마다 맛깔스럽게 퍼져 나가길 응원한다. 2월 24일 개봉.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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